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안 페론 (문단 편집) == 기타 ==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나치의 남미 도주|상당수의 나치 인사들이 아르헨티나로 도망쳐 오자]] 그들한테 보호비(?) 명목으로 돈을 받고 그들을 숨겨주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가톨릭]]과 커넥션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음모론]]도 존재하지만 페론은 가톨릭과도 마찰이 있었기 때문에 설득력은 낮다. 첨언으로 아르헨티나가 나치들을 많이 받아주긴 했지만 또 그게 사상적으로 후안 페론 정권 시절 극우에 기울었다는 증거는 못 된다. 왜냐하면 비슷한 시절, [[스페인 내전]]에서 패배한 [[스페인 제2공화국]]의 난민들을 비롯한 유럽 각지의 좌파쪽에 더 가까운 난민 및 망명객, 그리고 [[홀로코스트]]를 피해 유럽에서 남아메리카로 도망친 유대인과 집시들도 거리낌없이 곧잘 받아 주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스페인의 공화파 망명객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얼마 안 된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이미 몇년 전에 정착해, 젊은 시절의 '''[[체 게바라|에르네스토 게바라]]''' 같은 아르헨티나 청년들에게 사상적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했고, 한편으론 바로 몇년 전만 해도 저런 좌파 성향의 세력들을 가혹하게 탄압하다가 전범 재판을 피하려고 꽁무니 빠지게 도망친 나치의 전직 SS 친위대원들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었다. 즉, 당시 아르헨티나는 굉장히 이념적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살던 곳이었다. 후안 페론은 '''10대 소녀와''' 염문에 휩싸인 적이 있었다. 정확히는 아내 [[에바 페론]]의 사후인 1953년부터 2년간 '''넬리 리바스'''(Nelly Rivas, 1939~2012)라는 페론주의 학생조직의 회원과 서로 사랑에 빠져 정서적인 관계를 넘어 심지어는 [[페도필리아|성적 관계]]까지 맺은 적이 있었는데, 이 소식은 당대 아르헨티나의 가십거리가 되었다. 후안 페론이 군사 쿠데타로 쫓겨난 이후 넬리는 미성년자를 위한 교정 정신병원으로 이송되었으며, 이후 그녀가 후안 페론과 주고받은 편지가 1957년에 미국 언론에 공개되었다. 이 때문에 후안 페론은 1971년에 [[미성년자 의제강간]] 혐의로 기소되기도 했다.[* 참고로 아르헨티나에서는 15세가 미성년자 의제강간의 상한선이다.] 이후 넬리 리바스는 1958년에 결혼을 하고 두 자녀를 두며 평범하게 살다가 후안 페론이 1973년에 재선되었을 때 재회했고, 이후 그녀는 2012년 8월 28일에 7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페론주의]]는 항목에도 있지만 [[혼합정치]]를 대표하는 이념 중 하나로, 사회주의부터 가부장적 보수주의, 좌익대중주의, 경제적/사회적 진보주의, 파시즘(제3의 위치) 등 매우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다. 학자간에도 견해가 엇갈려, 정치학자인 폴 H. 루이스는 페론주의의 경우 [[제3의 위치]]적인 노선에서 권위와 민족적인 이상향을 강조한 점이 이탈리아의 파시즘과 유사하며, 페론주의가 이탈리아의 보통 파시즘만큼 급진화되지 못했던 것은 권력을 취했던 기간이 [[베니토 무솔리니]]보다[* 다만 그 무솔리니도 파시즘의 창시자로 평가받으면서도 막상 국내 정치에선 동시대 다른 파시스트들에 비해 매우 온건하긴 했다.] 짧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Lewis, P. H. (1980). 《Was Perón a Fascist? An Inquiry into the Nature of Fascism. The Journal of Politics》, 42(1), 242–256. doi:10.2307/2130025]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후안 페론의 1기 집권 당시 제1야당([[급진시민연합]])은 오히려 당시 기준 기득권/지식인층의 지지를 받는(...) 자유주의 성향이었고, 페론당이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들의 지지를 받는(...) 파시즘 세력이였다고 볼 여지도 있다. 다만 이 당시 페론이 취한 정책을 보면, 상기했듯 난민들도 좌우 안가리고 받았고, 각종 노동자 우대, 복지 정책, 여성 [[참정권]] 부여, 원주민 [[차별]] 해소, 가톨릭 [[교권 파시즘]]에 맞서 [[세속주의]] 추구라는 리버럴한 정책들도 대거 수용했기 때문에 마냥 파시즘이라고 몰기도 어려운 측면이 있다. 오늘날 [[정의주의자당]]은 2000년대 초에 재집권한 후 2003년 대선을 앞두고 페론당과 급진시민연합이 핵분열하여 좌파 블록과 중도파 블록, 우파 블록이 죄다 따로 후보를 낼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이 대통령 선거에서 놀랍게도 메넴이 1위를 차지했지만 결선 투표에서 참패할 위기에 처하자 사퇴하여 [[네스토르 키르치네르]]가 당선되고 아르헨티나 경제도 예상을 깨고 회복세에 접어들면서 좌파 페론주의 정당인 '승리를 위한 전선'이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2003년 대선을 앞두고 따로 창당된 우파 페론주의 정당들이 승리를 위한 전선에 합류한 것도 아니었다. 2015년 비 페론주의 우파로의 정권 교체 이후에도 제1야당인 승리를 위한 전선(중도좌파)과 제2야당인 연방 페론주의당(중도우파)[* 다만 여긴 전통적 관점에서 봐도 현대적 관점에서 봐도 이념적으로 페론주의와 딱 들어맞진 않는다.]이 모두 페론주의 성향의 정당으로 남아있었다. 정리하자면 후안 페론이 아르헨티나 근대사에 남긴 족적이 너무 커서 좌파, 우파 양쪽으로 전부 다 페론주의를 주창하는 정당이 있고, 또 같은 좌익이나 우익이라도 페론주의 성향이냐, 비페론주의냐에 따라 성향이 확 갈린다. 아르헨티나 공산당도 페론주의 성향의 사민주의자 및 중도좌파들과 이를 박박 갈았던 경우가 있었다. 게다가 또 상술했듯이 후안 페론이 권위주의적이고 개인숭배적인 성향이 강했다 한들 어쨋든 선거로 당선된 민주 정치인이었던 반면 페론을 쫒아내고 해먹은 군부는 노골적으로 전국적인 테러를 자행하며 경찰 국가를 만들려 했던 독재자들이었기 때문에 군사 독재를 겪으며 페론주의 세력은 역설적으로 야권 민주화 세력 중 하나로 변모했다. 당장 현대의 집권당인 정의당의 청년 조직인 '페론주의 청년단'(Juventud Peronista)만 하더라도 주요 사업 중 하나가 군사정권의 희생자 신원 확인과 명예 복권일 정도이니, 현대 아르헨티나 정치판에서 페론주의는 정말 딱히 정의를 내리기 힘들면서도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정치적 유산인 것은 분명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